History Of Kodak! (업데이트 2017.12.08)
Frame By Frame 2017. 2. 21. 21:24 |
prologue
2003년이니 벌써 10년도 넘은 예전일입니다.
오프라인에서 만난 몇몇분께 Kodak이 어느나라 회사인지 여쭤보니 대부분 일본이라 답하시더군요.
그 중에는 카메라를... 사진을 좀 안다 하시는 분도 일본으로 알고 계셔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Kodak은 필름을 만드는 회사중 가장 대중적인 회사입니다.
그러나 Kodak이라는 이름은 한 때 Camera라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졌을 만큼
카메라 역사를 말할 때도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필름과 필름카메라는 역사의 페이지를 디지탈카메라에 넘겨 주고 말았습니다.
이 강좌를 기획한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은 Canon이나 Nikon과 같은 일본의 대중적인 카메라들에 밀려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카메라의 대중화에 밑바탕이 된 Kodak과 Kodak을 이끌어간 George Eastman이라는 기업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취미 생활에 깊이를 더하고 사진 역사의 행간을 읽는 소중 기회가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의상 강좌내용에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아무쪼록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재 게시에 관한 공지와 당부
처음 이 글이 작성된 2003년경에는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코닥 USA의 홈페이지(kodak.com)에 게시된 History of Kodak의 제목과 구성을 그대로 옮겨와
일일이 번역기를 돌려가며 부족한 부분은 검색을 통해 자료를 모아 작성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작성된 원문은 모 DSLR커뮤니티의 강좌게시판에 3회에 걸쳐 연재가 되었으나
2015년 초에 본 블로그로 옮기고 그과정에서 일부 데이타가 유실되었고
2017.12에 오류를 수정하고 이미지를 대폭 보완해 다시 업데이트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검색을 해보면 제가 예전에 올렸던 초기 버전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출처만 표기한다면 자유롭게 공유하도록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출처 없이 퍼간것도 모자라 본인이 쓴것처럼 카페에 올리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공유를 위해 작성한 글이라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었다면 몰지각한 행동이긴 하나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해 잘못된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함부로 퍼가는 경우
출처마저 없다면 잘못된 정보가 무분별하게 퍼지는 것을 바로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본 블로그의 모든 글은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지속적으로 오류를 수정하고 자료를 업데이트 하고 있으며
이것은 글쓰는자의 책무이자 읽는 이에게 드리는 감사의 또 다른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부탁드립니다.
• 참조한 자료 및 홈페이지 주소
백업본이 예전 블로그에 남아있어 확인해 보니 현재(2017.12) 코닥 USA의 홈페이지는 리뉴얼로 인해
해당 링크가 대부분 삭제되었고 사진 대부분에 직접 링크를 걸어 원문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으나
사진 역시 엑박이 뜨는지라 모든 자료를 다시 모아야만 했습니다.
이번 업데이트의 기초로 삼은 것은 본사 홈페이지 Kodak.com의 Laying the Foundation ∞의 내용입니다.
아쉽게도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History of Kodak의 내용과 달리 대폭 축소되었고
현재는 동일한 내용이 한국코닥 홈페이지에 번역되어 올라와 있습니다
이참에 갈아 엎고 새로 작성하려 했으나 이러한 이유로 불가피하게 기존에 작성했던 대부분을 살려두고
본사 홈페이지의 정보를 한국 코닥의 번역본과 비교해가며 본문의 오류를 수정하였습니다.
뼈대는 크게 변한게 없지만 내용을 일부 추가하고 이미지를 크게 보완하여 많은 부분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은 아래 기재한 주소와 검색을 통해 보완하였습니다.
http://kodak.com (USA 코닥) ∞
http://kodak.co.kr (한국 코닥) ∞
http://eastman.org (George Eastman Museum) ∞
http://kodakgirl.com ∞
http://www.brownie-camera.com ∞
https://www.kodak.com/corp/aboutus/heritage/georgeeastman/default.htm (바탕이 된 본문) ∞
http://www.kodak.co.kr/2014/about/history.asp (한국 코닥의 번역본) ∞
https://www.kodak.com/corp/aboutus/heritage/milestones/default.htm (연보) ∞
http://www.web4homes.com/cameras/kodak-early.htm ∞
이번에는 해당 자료의 원문을 확인할 수 있도록 ∞ 표시를 하고 링크를 걸었으며
클릭하시면 해당 페이지에서 전체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일부 이미지는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 •
2003년 4월 코닥에서 DX6340 이라는 310만화소에 광학 4배줌 보급형 디카를 출시했는데
나의 첫 디지탈 카메라가 바로 이 DX6340이었다.
당시 코닥에서는 이지쉐어(Easyshare)라는 이름으로 보급형 카메라 시리즈를 판매했었는데
쉽게 공유한다는 뜻에 맞춰 몇가지 주변기기를 함께 발매했지만 카메라의 인기에 비해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았던거 같다.
하지만 이지쉐어라는 네이밍은
초창기 코닥을 대표했던 브라우니에서 시작해 반세기가 훨씬 넘는 시간동안
코닥이 지향했던 바가 무엇이고 어떻게 소비자와 소통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
|
Kodak EasyShare DX6340 |
History Of Kodak!
1910 |
사진의 역사는 약 200년이라고 한다. 그 200년의 역사중 코닥의 역사는 약 120년이 넘는다. Kodak이 탄생한 1800년대 후반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도 드물었고... 당시만 해도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힘든 일이어서 사진을 찍으려면 단 한번의 출사에도 암실로 사용할 텐트까지 들고 다녀야 했다고 하니 일종의 노동이었을 뿐 아니라 촬영, 현상 인화까지 전부 혼자서 해야 했으므로 전문적인 화학지식마저 갖추고 있어야 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롤(Roll)로 된 필름대신 습판이나 건판을 사용했으므로 사진 한장을 찍기 위해 유리나 금속으로 된 수십장의 감광판을 들고 다녀야 했다. |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24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얇은 기왓장 24개를 들고 다닌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습식감광판(습판)이나 건식감광판(건판)은 근대 사진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다게르(L.J.M Daguerre; 1787.11.18~1851.7.10)와 니에프스(J.N. Niepce; 1765~1833)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이들이 프랑스 학사원에서 공동의 연구결과를 발표한 1839년 8월19일을 사진술의 기원으로 삼는다.
|
|
니에프스 (J.N. Niepce) 다게르 (L.J.M Daguerre) |
Miniature Chambre Automatique |
우측 사진은 프랑스의 Adolphe Bertsch社에서 만든 카메라로 1861년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필름 대신 습식판(wet plate)을 사용한 제품인데 고정초점방식이고 당시로서는 상당히 작은(miniature) 제품으로 분류되는 카메라이다. |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차지했으나
George Eastman으로 인해 사진의 역사는 Kodak이전과 Kodak이후로 나눌만큼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From Glass Plates to Digital Images 유리판에서 디지탈 이미지 까지...
이 말은 Kodak 홈페이지의 History of Kodak이라는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현재는 홈페이지 리뉴얼로 인해 바뀌었다.)
Glass Plates라는 말은 유리판 정도로 해석이 되겠지만 사진에서 유리판이란 감광판을 의미하며
특히 Kodak에 있어서 From Glass Plates는 '이스트먼 건판회사'의 첫 제품인 "건판"을 의미한다.
사진의 역사에서 1880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보는데
이것은 George Eastman이 이스트먼 건판회사(Kodak의 전신)를 세운년도가 1880년이기 때문이다.
|
이스트먼 건판회사의 첫번째 사무실 (법적인인 설립년도는 1881년이나 대부분 1880년으로 표기함.) |
뉴욕 북부에 있는 유티카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워터빌(Waterville)이란 곳에서
마리아 킬번(Maria Kilbourn)과 조지 워싱턴 이스트만 (George Washington Eastman)의
3남매중 막내로 1854년 7월 12일 태어났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특출난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학문적으로는 더 더욱 특출나지 않아서(^^ ) 공부를 하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던것 같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는 14세되던 해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는데
이는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고
누나마저 소아마비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보험 회사에 메신저 소년(사환?)으로서 일하게 된 이스트먼의 급여는 주당 3$였다.
성실하게 일한 이스트먼은 주당 5$까지 받게 되어 급여는 늘었지만 정작 자신의 돈은 없었다.
주당 5$로는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857: 첫번째 사진 3세 1867: 13세 1884: 30세
이스트먼은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야간에 회계학을 공부했으며 5년뒤에는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로체스터 저축 은행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때 그의 급료는 주당 15$로 세배가 올랐다. (좋았겠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가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된건 아주 우연한 사건(?)때문이다.
그는 4년 동안 은행에서 일하며 언젠가는 멋진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게 그리 쉽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가 계획했던 여행지는 산토 도밍고 였는데 워낙 장거리 여행이었고 당연히 비용도 만만치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동료에게 털어놓자 그의 동료는 사진을 찍어오기를 제안했는데
당시는 사진이 귀한 때였고 이국적인 풍광을 사진에 담아오면 출판도 가능할 것이고
이걸로 여행비의 일부를 건질 수 있을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이스트먼은 한달치 월급을 털어 사진을 찍기 위한 기자재를 사 모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사진을 한다는 건 무지막지한 돈이 드는 일이군요.)
출판까지 계획하고 있었기에 대충 찍어 올 수는 없었으므로 사진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사진을 찍는 것은 상당한 지식을 요하는 일이었고
이스트먼은 사진찍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곧 사진에 매료되었다.
이스트먼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고 심지어 완벽주의자이기까지해서
화학을 비롯해 사진에 관한 모든것을 알기를 원했기 때문에
몇년 동안 돈까지 모아가며 계획했던 여행마저 포기하게 된다.
그뿐아니라 국제적인 사진기술서나 최신 화학책등을 공부하기 위해
독어, 프랑스어 까지 공부하는 수고도 마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가 약 1878년으로 이스트먼 건판회사를 세우기 약 2년전의 일이다.
그는 사진을 잘 찍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빛에 민감한 감광판이 필요했다.
결국 외국잡지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새로운 감광제를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부엌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2년이 지나서야
어느정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스트먼의 첫상품인 건판에 사용된 감광제가 바로 이 때 개발된 것으로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스트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광제를 감광판에 코팅하는 기계를 발명하게 된다.
당시에는 사람이 붓을 이용해 각각의 감광판을 하나 하나 칠할 때였으므로
이스트먼이 발명한 감광판을 코팅하는 기계는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이스트먼은 여행경비로 모아둔 3,000달러와 코팅기계의 특허를 양도하며 받은 돈으로
이스트먼 건판회사를 설립하고 건판제조에 뛰어든다.
그러나 당시는 습판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판은 신기술에 속했고
검증되지 않은 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일단 사업을 시작하자 판매량은 급속하게 늘어났고
1881년에는 월 4,000달러의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그는 상당한 돈을 벌게 되었지만 이때 까지는 은행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Kodak factory at Harrow, 1890s Box of EASTMAN Dry Plates, early 1880s
하지만 성공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건판을 사간 고객들이 하나 둘 반품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상은 확인했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 이스트만은
약 500여회에 걸친 방대한 테스트를 진행하지만 역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다 모스 & 스완社(이스트먼에게서 코팅기계 제조권리를 사간 회사)에 방문후
감광판에 바르는 젤라틴에 불순물이 섞여 있어서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스트먼은 중대결정을 내린다.
문제가 된 모든 감광판을 수거하고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기로 한 것이다.
Kodak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스트먼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Making good on those plates took our last dollar,"
"(교체하기 위한)좋은 건판을 만드는 일은 우리의 마지막 달러마저 가져가 버렸다."
"But what we had left was more important - reputation."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으며 그것은 명망(평판,신뢰)이다."
이로 인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나
이때 얻어낸 신뢰는 '이스트먼 건판 & 필름회사'에서 'Eastman Kodak Company'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리콜의 결과는 실로 엄청나서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해에는 새 건물로 이전하게 된다....(^^ )
사진사들은 이제 다른 상품보다 이스트먼의 건판을 선호했다.
그러나 사진사들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건판은 습판보다 한결 편하게 신뢰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들어 주었지만
역시 아직까지 사진은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다.
이스트먼은 사진촬영이 조금더 대중적이길 원했고 이를 위해 4가지 지침을 만들었다.
• mass production at low cost (저 가격에 대량 생산)
• international distribution (국제적인 배급)
• extensive advertising (광범위한 광고)
• a focus on the customer (고객에게 초점을)
이 네가지는 모두 아주 가깝게 연관지어져 있었다.
대량생산은 저 가격을 실현할 수 있었고
이는 국제적인 배급을 필요로 했으며 배급은 강력하고 광범위한 광고없이는 해결될수 없었다.
특히 이 모든것은 고객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다.
1884 |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스트먼은 감광판으로 사용되는 유리를 없애기로 한다. 대용품으로 종이를 생각했으나 종이는 만족스러울 만큼 빛을 투과시키지 못했다. 그는 종이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 피마자 기름을 이용했으나 (기름종이를 연상하면 될듯...)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두루마리처럼 말수 있는 필름의 잠재력을 알았고 종이 감광판은 그 시작이 되었다.
언젠가는 롤 형태로 만들 수 있는 필름을 개발할 수 있을것으로 확신했으므로 1884년 '이스트먼 건판회사'는 '이스트먼 건판 & 필름 회사'로 개명을 하게 된다. |
1892: State Street Camera Works plant Aerial View Of Kodak Office Complex Before 1980
회사가 커지자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이스트먼 건판회사는
Henry A. Strong이 회장으로 있는 14명의 주주를 가진 주식회사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이스트먼이었다.
(Henry A. Strong은 이스트먼의 어머니가 한때 하숙집을 할때 함께 지냈던 하숙생이었으며
이스트먼 건판회사를 설립할 때 돈을 댔던 투자자이기도 하다.)
1885년 정기 간행물을 중심으로 광고를 시작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다.
당시 관심을 쏟던 신 상품은 브로마이드 인화지였는데 이것은 감광제로 브롬화 은을 사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브로마이드 인화지는 예상했던것 보다 화질이 많이 떨어졌지만
확대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후에 클로로 브로마이드로 개선되었다.
당시에는 사진사마다 서로 다른 크기로 확대 하고 있었고 이는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었다.
이스트먼은 자사로 보내오는 브로마이드 인화지를
원하는 사이즈로 확대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이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실패와 성공사이를 오갔지만 '이스트먼 건판 & 필름 회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현재 커다랗게 확대되어 잡지와 함께 제공되는 스타들의 사진을 브로마이드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확대가 가능했던 브로마이드인화지가 어원인것으로 생각된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스트먼에게는 화학적인 전문지식이 필요했고
결국 1886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헨리 라이언 바흐라는 화학자를 영입한다.
1886년 6월 Kodak(코닥)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알려 지지만
Kodak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이 말은 사전에도 없는 생소한 말인데다 어느 누구도 이 단어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호하고 신비스럽기 까지 해서 일부는 Kodak이 의미없는 농담에 불과하다고 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1887년 봄을 맞이하게 되는데 1887년은 이스트먼이 드디어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한 해이다.
이스트먼은 건판 제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에 1887년 소형 카메라를 제작하게 되는데
판매를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시장진입을 위해 대중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시제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스트먼 건판 & 필름 회사(Eastman Dry Plate and Film Company)에서
새로 만든 소형 카메라의 이름이 Kodak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강한 어감으로 인해 이스트먼 건판 & 필름 회사를 알리는 계기가 된다.
Kodak을 너무 마음에 들어 했던 이스트먼은 즉시 상표등록을 한다.
새로운 단어라 상표 소송 시비에 걸릴 일도 없었지만 이스트먼은 이부분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앞에서도 언급한것 처럼 사전에도 없는 이 단어가 상표등록까지 되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이스트먼은 Kodak의 의미를 묻는 많은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I devised the name myself.
The letter "K" had been a favorite with me - it seems a strong, incisive sort of letter.
It became a question of trying out a great number of combinations of letters that made words
starting and ending with 'K.' The word 'Kodak' is the result."
"나는 이 이름을 직접 고안했다.
K는 나의 마음에 와닿는 강하고 예리한 글자였으므로 결국 K로 시작하고 K로 끝나는 낱말을 조합해보기로 했고
Kodak이 바로 이러한 고민의 결과였다." (번역기 돌렸음. 좀 어색하더라도 이해 바람)
또한 Kodak이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상표 등록할 때 첨부했다고 한다.
• Kodak은 기억하기 쉽게 짧고 간결하다.
• 새로운 단어이나 발음에 문제가 없다.
• 예술적인 어떤 단어와도 닯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예술적인 다른 것들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즉, 새로 만들어진 카메라의 이름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Kodak은 아무 뜻도 없는 단어이다.
그러나 반세기가 흐른뒤 사람들은 Kodak특약점에서 "Kodak주세요." 라는 말로 모든 요구를 통일해 버렸다.
필름을 원하는 사람도 카메라를 원하는 사람도 "Kodak주세요" 라고 말하면 다 되었던 것이다.
George Eastman Kodak에는 광고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광고 문구가 있다.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당신은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카메라는 지금과 같이 롤로된 필름이 아닌 각각의 건판(감광판)을 이용해 이미지를 기록했으므로
사진을 찍기 위해 화학적인 지식이 필요했고 사람들은 수많은 화학약품에 대해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사진이 대중화 되기를 희망했던 이스트먼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생각을 해낸다.
일단 카메라를 구입한 고객들은 필름을 다 사용한뒤 카메라를 공장으로 보내면
공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필름을 현상해 주고 카메라에 다시 필름을 끼워 고객에게 돌려 보내는 방법이었다.
위의 광고는 이러한 시스템을 알리기 위해 더 없이 훌륭한 말이었고 재치있는 선택이었다.
이스트먼은 이에 그치지 않고 광고비라는 항목을 만들고 지속적인 광고를 하게 되는데
당시 대부분의 회사들은 광고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신경쓰는 기업이라 하더라도
광고비를 따로 책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광고가 가진 위력을 알았던 그는 일명 Kodak Girl ∞ 이라고 불리는 광고를 기획한다.
아름다운 여성이 행복한 모습으로 미소지으며 Kodak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Kodak 카메라 역시 잊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젊은이들, 특히 10대들에게 Kodak Girl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특별했다.
이 광고는 발랄함과 자유를 상징했으며 Kodak카메라를 소유하는 것은 곧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뜻했다.
신문, 잡지, 포스터, 엽서등에 사용되었고 사람들은 Kodak Girl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Kodak Girl은 이후 수십 년간 광고에 사용되었으며 신기술의 개발과 더불어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Poster에 사용된 KODAK GIRLS
|
|
|
|
KODAK GIRLS을 인쇄한 엽서
1888년... Kodak은 카메라 생산을 시작한지 채 1년이 안되어 13,000대의 카메라를 판매하게 된다.
당시 일반적인 카메라 회사들(가내 수공업적인)은 판매량을 계산할 때
보통 두자리를 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실로 엄청난 판매량이었다.
이후로도 사업은 계속 확장되었고 1889년에 새로운 방식의 감광제를 개발한다.
같은 해 영국에는 이스트먼 사진재료상사를 설립했으나 이걸로는 부족해서 2년뒤 런던외곽에 공장을 하나 더 세웠고
1890년에는 파리에 Kodak SAF를 베를린에는 Kodak GMBH를 건립한다.
초기 Kodak제품의 판매는 각 마을마다 있던 약국에서 겸하고 있었다.
이스트먼은 해당지역의 독점 영업권을 보장해 주었으므로
나중에는 약국에서 Kodak대리점으로 업종변경 하는 경우도 생겨났던것 같다.
약국을 판매망으로 이용하는 것은 직영으로 판매점을 운영하는 것보다 비용은 적게 들어갔지만
일관된 이미지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스트먼은 이러한 방법이 Kodak의 이미지를 손상 시킬것을 우려했으므로 결국 대리점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이집트등에도 Kodak 특약점이 생겨났다.
카메라의 판매는 Kodak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1892년 회사이름을 Eastman Kodak Company로 변경하기에 이른다.
한때 전세계 어디에나 있었던 Kodak Express
이스트먼은 Kodak이 누구에게나 친숙한 이름이길 원했고 사진촬영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길 바랬다.
원하는 대로 사진촬영은 대중화 되기 시작했지만 이스트먼이 원한것은 대중화만은 아니었다.
그는 Kodak이 최고의 제품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되길 원했으므로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의 X선 발견은 그가 기다리던 또 하나의 도전을 의미했다.
늘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자 했던 이스트먼은 X선을 찍을 수 있는 필름 개발을 시작했고
그의 노력은 1년뒤 X선 감광판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
최초의 방사선 사진 빌헬름 뢴트겐이 아내의 손을 찍은 것 (여기에 사용된 X-ray필름이 Kodak의 제품인지는 확인하지 못함) |
Kodak에서 만든것은 "감광판"이라서 "필름"은 언제 출시되었는지 찾아봤는데
후지필름 코리아 홈페이지의 의료 시스템∞에 부분을 살펴보면
"후지필름은 1936년에 자사 최초로 X-ray 필름 제품을 출시했으며..." 라고 기재하고 있다.
"자사 최초"라는 표현을 쓴걸 보면 후지 이전에도 어딘가에서 생산한듯 하지만
검색을 좀 해보면 한참뒤인 1989년 아그파에서 세계 최초의 엑스레이 "필름"을 출시했다고 나온다.
아무튼...
1896년에는 100,000대 이상의 카메라가 생산되었으며
롤 필름을 비롯해 매달 400마일에 해당하는 필름이 제조되었다.
1890년대 말에는 더욱 늘어나서 독점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매출은 급격히 늘어나 카메라 판매량은 150만대에 육박했고
매월 600마일에 해당하는 필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며 이것으로도 모자라
Kodak은 다른 회사들마저 사들이기 시작한다.
Camera manufacturing in the 1890's. (카메라를 만들고 있는 Kodak공장)
이스트먼은 회사의 성장을 기뻐했지만 스트롱(회장)과 소비자들은 급성장을 못마땅해 했다.
스트롱은 Kodak의 급성장이 비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갑작스런 판매량 감소를 두려워했다.
그는 스트롱에게 "우리가 매년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고 새로운 제품을 생산한다면
어느 누구도 우리와 견줄수 없을 것이며 우리는 지속적으로 시장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소비자들은 이와 반대로 Kodak이 독점 하게 되면 분명히 필름과 카메라의 값을 올릴거라 생각했으므로
Kodak의 독점과 경쟁사마저 사들이는 Kodak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러나 이스트먼의 생각을 달랐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사진을 즐기길 원했고 이를 위해 최대한 저렴한 카메라 생산을 원했다.
브라우넬은 이스트먼의 소망에 부합되는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고 1900년 브라우니라는 이름을 가진
단 돈 1$짜리 카메라를 판매하게 된다.
Frank Brownell Brownie Camera
Kodak의 역사를 얘기할 때 프랑크 브라우넬을 빼놓을 수는 없는데...
브라우넬은 개인사업을 하는 사업가이자 Kodak을 위해 일한 유능한 디자이너였으며
이스트먼은 그를 세계가 인정한 위대한 카메라 디자이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짜리 카메라 브라우니는 바로 프랑크 브라우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브라우니는 어린이용으로 제작되었는데 Kodak Girl보다 더 유명해져서
브라우니 소년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신문광고나 잡지광고에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각종 소년 사진클럽과 사진전등을 탄생시켜 사진촬영이 보다 대중화 되는데 일조를 한다.
당시 6장을 찍을 수 있는 필름 한 통이 15센트였고 사진을 인화하는데는 45센트면 충분했었다고 하니
시장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브라우니는 출시된 첫해 25만대가 판매되었고
초기의 상자형 디자인은 거의 변하지 않은채 8년이나 판매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스트먼이 가졌던 1$카메라의 꿈은 이렇게 이루어 졌다.
Kodak의 이름을 알리는데 공헌한 브라우니
|
|
|
|
|
|
1900 |
1902 |
1902 |
1908 |
1916 |
1924 |
|
|
|
|
|
|
1937 |
1946 |
1950 |
1952 |
1961 |
1962 |
브라우니 포스터 (1달러임을 강조한 초기의 포스터부터 플래쉬가 등장한 1946년 광고등)
브라우니의 성공은 Kodak을 내려올 수 없을 만큼 높은자리에 올려 놓는다.
물론 수없이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노란색 바탕의 Kodak글씨는 성공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고
어느 누구도 Kodak이 무슨뜻인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제 Kodak은 그냥 Kodak으로 이해 되었다.
회사가 커지자 공장을 이전 해야 했는데 어떤 때는 한 해에 3번이나 공장을 옮겨야 했고
이에 지친 이스트먼은 런던외곽에 Kodak Park라는 공장단지를 세운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것 처럼 1892년 회사 이름을 Eastman Kodak Company로 변경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이스트먼 개인의 몫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는 조직의 번영이 반드시 발명과 특허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근로자의 선의와 충성도에 기인한다고 보았고
노동자는 충분한 임금 이상의 그 무엇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기에 비즈니스의 기본 원칙에 다음 내용을 추가했다.
• foster growth and development through continuing research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성장 및 개발 촉진
• reinvest profits to build and extend the business, and
이익을 재투자하여 사업을 구축하고 확장하며,
• treat employees in a fair, self-respecting way
공정하고 자기 존중하는 방식으로 직원을 대합니다. - 구글번역기가 수고해 주셨습니다 ^^
그는 직원들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회사발전을 위한 건의사항이 있을 때
늘 자신과 상의하기를 원했으며 공장내에서 직원들을 만날 때 마다 이러한 점을 당부하곤 했다.
더 나아가 건의를 활성화 하기 위해
우수한 내용의 건의사항에는 포상금을 주는 제도를 만들어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최고 경영자가 원한다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건... 직장생활을 해본 분들은 다 아실겁니다.)
이러한 건의제도가 시행된지 1년뒤(1899) 놀라운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때 Kodak은 주식회사가 되어 있었고 주식이 발행되어 생긴 막대한 이익을 근로자와 함께 나누길 원했다.
이스트먼은 Kodak의 성공이 근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때문이라 생각했고
당연히 Kodak의 직원들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바로 실행에 옮겨 졌고 총 금액 17만 8천달러를
3천여명의 직원에게 배당금이란 명목으로 나누어 주었다.
1인당 60달러 정도였지만 이것은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경영자와 근로자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서로간의 신뢰라고 생각했던
이스트먼의 평소 소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화폐가치를 감안하면 적은 금액은 아닌듯...)
회사의 이익을 근로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배당금정책은
1912년에 이윤분배 제도의 하나로 공식화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04년에는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하루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줄였다.
그러나 임금에는 변화가 없었으므로 이 역시 근로 복지의 하나로 시행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Kodak이 안정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분위기로 볼때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코닥이 급성장한 이 때는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유진뎁스가 풀먼차량회사의 파업(1894년)을 주도하며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시기이고 1905년은 세계산업 노동자조합이 창설된 해이기 때문이다.
필름을 제조하는 공정에는 각종 화학물질이 사용되므로 상당히 위험했는데
Kodak공장 역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셀룰로스 질산의 경우 강한 인화성을 가지고 있어서 취급시 주의가 요구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이스트먼은 인체에 무해한 방법으로 필름을 제조할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하도록 지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셀루로스 아세테이트를 이용한 제조공정이 개발되고 1908년에는 안전한 필름을 양산하게 된다.
그가 제품생산에 완벽을 기했던것 처럼 근로자에 대한 혜택 역시 동일하게 적용되었고
1911년 혜택, 사고 연금을 만들었으며 사고 예방을 목적으로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제도로 인해 5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려는 위험에 노출된 직원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이것은 다시 더 큰 생산성 증대로 이어졌다.
1906: Employees making film boxes at the Kodak Park site
이 당시 이스트먼은 독일의 대규모 화학회사를 방문하는데 바로 이곳이 아스피린을 개발한 "바이엘"이다.
바이엘社를 방문한 그는 연구원들을 보고 대단히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
연구원들의 수준 때문이 아니라 연구원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였다.
당시 Kodak에는 대략 10여명의 화학자가 일하고 있었지만 바이엘社의 연구원 수는 Kodak의 약70배..
즉 700여명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는 Kodak이 유능한 연구인력을 확충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회사들에게 뒤쳐질거라 생각했고 연구실을 맡아줄 사람을 찾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래튼&웨인라이트 사진회사의 공동이사였던 '찰스 미즈'박사를 적임자로 내정한다.
찰스 미즈박사는 이스트먼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지만 래튼&웨인라이트에서 동고동락한 동료들을 걱정스러워했다.
결국 미즈박사는 자신을 원한다면 래튼&웨인라이트도 함께 인수해달라는 조건을 건다.
이스트먼 역시 미즈박사의 요구를 주저없이 받아들였으므로 회사 전체를 즉시 매입한다.
래튼&웨인라이트는 Kodak으로 넘어갔지만 비슷한 업무를 계속할 수 있어서 다들 만족스러워 했고,
아무도 직장을 잃지 않았기에 찰스 미즈를 비롯한 래튼&웨인라이트의 모든 직원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모두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음을 다행스러워 했던 죠지 이스트먼이었다고 한다.
찰스 미즈는 1913년초 Kodak Park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에 들어간다.
이스트먼은 찰스 미즈박사에게 "당신이 바로 사진기술의 미래입니다."라고 말했을 만큼 기대가 컸다.
뒤에 서술하겠지만 미즈박사는 이를 저버리지 않고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1920: Synthetic Chemical Laboratory (화학 연구실)
이스트먼이라고 항상 성공가도만을 달려온것은 아니다.
라이엔바흐(Kodak의 화학자)가 1889년 새로운 방식의 투명 필름을 개발하게 되고
이스트먼은 이 제품을 특허청에 제출하지만 등록을 거부당한다.
이러한 방식의 필름이 이미 12년전에 특허 등록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등록을 한 사람은 목사이자 아마츄어 사진사였던 한니발 굿 윈이었는데
이로 인해 25년간이나 특허시비에 휘말렸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특허권을 소유하고 있던 안스코社에
500만달러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종결짓게 된다.
이뿐 아니라 수많은 업체들로부터 견제를 당했는데
미 법무부는 Kodak이 경쟁사들을 없애고 시장을 독점하며
가격을 마음대로 저울질 할거라고 생각하에 여러번 Kodak社에 경고 한다.
Kodak의 성장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몇몇 회사들도 독점기업이라는 이유로 소송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불행히도 2년뒤 독점으로 판결이 났으며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이스트먼은 항소를 한다.
하지만 결국 1921년 미 법정은 Kodak의 독점을 막기위한 조치로 타 회사를 매입할 수 없도록 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917년 미국이 참전하자 Kodak은 군수물자 생산기지로 변모한다.
비행기에 사용되는 화학약품들을 생산했으며 이스트먼은 미 공군에 공중사진촬영에 대해 제의한다.
미군은 공중 사진술에 대해 회의적이었던것 같다. 결정은 쉽게 내려 지지 않았고 전쟁은 치열해져만 갔다.
그러나 일단 공중촬영을 시작하자 군사적 효용가치가 높다는걸 확인하곤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다.
전쟁은 사진의 보급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전쟁터로 떠나는 가족들을 위해 기념사진이 필요했고
스냅사진의 필요성은 카메라와 필름의 보급을 앞당겼으며 "군인을 위한 Kodak카메라"까지 만들어 졌다.
1920년(1919년 평화협정 체결)에는 전쟁이 일어난 1914년에 비해 5배나 많은 카메라를 팔게 된다.
Army Training Camps (1917) Soldier's Kodak
그는 열심히 일한 직원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싶어했다.
더구나 전쟁기간 동안에도 열심히 일해준 직원들에게 감사했고
이러한 마음을 그가 가진 주식의 3분의 1을 직원들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당시 1,000만 달러 상당)
이 뿐 아니라 근로자들이 집을 장만할 수 있도록 주택자금을 대출해 주었으며
저축이 꾸준히 이루어 지도록 대부협회를 만들었다.
이스트먼의 근로자들에 대한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든 근로자가 퇴직후에도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연금제도를 도입했으며
직장생활중 있을 수 있는 장애와 사고를 대비한 보험까지 가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당시 분위기로 볼때 회사가 흑자를 내더라도 위와 같은 파격적인 대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이러한 복지 정책은 대단히 특별하고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사업은 계속 확장되어 Kodak은 '테네시 이스트먼회사'라는 화학회사를 만들었고
이 회사를 통해 필름의 재료를 공급받게 된다. 제품생산에 필요한 원자제를 자체 생산 할 수 있게 된것이다.
테네시 이스트먼회사는 후에 독자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종합 화학회사로 변모하게 되고
사진과 직접 관련이 없는 수많은 화학제품을 생산한다. 그중에는 양탄자용 인조섬유까지 있었다.
섬유를 생산하고 있는 테네시 이스트먼회사
1920년대가 지나자 영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Kodak은 할리우드에 카메라와 필름을 비롯한 영화 기자재를 공급한다.
당시 Kodak은 테크닉 컬러라는 영화사와 파트너쉽 관계에 있었는데
정부는 Kodak과 테크닉컬러社가 시장을 독점하고 영화산업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난을 한다.
그러나 헐리우드는 영화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Kodak의 업적을 인정하고 오스카상을 수여한다.
(정확하게는 1908년 생산한 무해한 필름개발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것으로 1950년 오스카상을 받게됨.)
이스트먼의 사진에 대한 열의는 계속되었고 이것은 1923년 코다스코프 영사기를 개발로 이어진다.
코다 스코프가 바로 가정용 캠코더의 시초라 할 수 있으며 Kodak社의 새로운 시장의 개척을 의미했다.
그러나 쉽게 일반화 되지는 못했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으며 아직까지는 흑백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학교나 기업에서 기록영화의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며 사람들에게 알려 졌다.
George Eastman House, 1854–1932 (현재는 Eastman Museum으로 변경되었다고 함)
1928년 역사적인 파티가 이루어진다.
이 파티는 로체스터에 있는 이스트먼의 저택에서 열렸다.
그는 에디슨을 비롯해 기업가와 정치가들을 초청했으며
참석한 손님들에게 새로운 필름이 들어있는 Kodak카메라를 사용해보도록 권했다.
이스트먼은 저녁만찬이 있기전 막간을 이용해 필름을 현상해 참석자들이 직접 찍은 필름을 보여주었는데
참석자들은 자신이 찍은 화면을 보고 대단히 놀라워했다.
카메라에 사용된 필름은 Kodak의 첫 컬러 필름이었으며 참석한 모든이들은 천연색의 새로운 화면에 압도 되었다.
각계 유명인사들의 감탄은 바로 광고로 이어졌다.
Kodak은 더욱 유명해 졌지만 새로운 필름은 그리 폭넓게 활용 되지는 못한거 같다.
딱 한판 밖에는 만들수 없었으므로 가정용 영화로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트먼과 토마스 에디슨 (Eastman and Thomas Alva Edison collaborated to make motion pictures possible.)
이스트먼은 자선활동을 많이 했으며 대부분은 스미스라는 가명을 이용했다.
미국의 흑인사회와 대학들에 도움을 주고 싶어했는데 특히 대학교에는 많은 돈을 기부 했으며
로체스터에 설립한 이스트먼치과 병원은 평판도 매우 좋아서 비슷한 치과 병원이 여러곳에 생겼다.
(엄청난 돈을 여러 대학에 기부했는데 이는 이스트먼 상업대학을 설립했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을거란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Kodak제국을 건설한 이스트먼도 철인은 아니어서
1920년대 말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척추질환을 진단받았으며 동맥경화증으로도 상당기간 고생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죠지 이스트먼은 1932년 3월 14일 가까운 친구들을 불렀다.
그는 친구들을 증인으로 유언장을 수정했으며
유언장에는 남은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로체스터 대학에 기부한다고 쓰여 있었다.
유언장의 내용을 수정한 이스트먼은 서명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잠시 후 이층에서는 총성이 들려 왔다. 그는 자살로 77년의 생을 마감했으며 미혼이었다.
그의 시신 옆에서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할 일은 다했다.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말년의 죠지 이스트먼 (1930)
이스트먼이 떠난 이후에도 Kodak은 지속적인 성장을 했고
미즈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상업적으로 사용가능한 새로운 방식의 X선 필름을 개발하고
1935년에는 적,녹,청색을 사용한 코다크롬이라는 필름을 개발하였으며 이로 인해 35mm시대가 열리게 된다.
Kodak은 1960년대 중반 인스터매틱 카메라를 개발하게 된다.
이 제품은 당시 7000만대 이상 팔렸으며 포켓용 인스터매틱 카메라도 2500만대 이상 판매 되었다.
KODACHROME Film KODAK INSTAMATIC cameras
1976년에는 즉석카메라 시장에 뛰어드는데 이미 폴라로이드社에서 이미 손을 대고 있던 영역이었다.
특허에 문제가 없을것으로 생각했지만 상품이 출시 되자 폴라로이드측의 고소로 인해 다시 특허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10년에 걸친 분쟁은 결국 Kodak의 패배로 끝났으며 1991년 9억 2천만달러가 넘는 금액을 폴라로이드사에 배상하였다.
그리고 이스트먼 건판회사가 불량 건판을 리콜했던 것처럼 Kodak은 모든 카메라를 수거 하였으며
소유주들 역시 이에 따른 보상을 받았다.
상품이 다양해 지면서 Kodak社가 100주년이 되던 1980년에는 혈액분석기까지 생산했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150여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2000여종 이상의 제품을 판매 했다.
특히 1990년에 선보인 1회용 카메라는 날개 돋힌듯이 팔려서
1993년에는 전세계에 1억대가 넘는 1회용 카메라가 판매가 되었다.
필름이 들어있는 이 카메라는 판매된뒤 촬영이 끝나면 현상소로 보내졌고
필름은 인화해서 고객에게 돌려 줬으며 분리된 카메라 본체는 재활용을 위해 Kodak에서 수거해갔다.
이제 이스트먼은 없지만..
값싸고 환경친화적이며 고객지향적인 이 카메라는 그의 평소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로도 Kodak社는 성장을 거듭했으며 1994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25대 기업중 하나가 된다.
• • •
epilogue
코닥과 아그파 그리고 후지가 필름으로 전쟁을 치루던 시대는 역사가 되었다.
140년을 이어온 아그파는 2005년 5월 파산했다.
Kodak은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1월 파산했다.
후지는 살아남은 듯하지만 2015년 기준으로 전체매출에서 필름이 차지하는 비중은 1%도 채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필름의 시대는 갔고 Kodak 또한 말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 • •
Before | 현재
Kodak at the NY World's Fair in 1939
Combat photographer films war, 1944 Man testing focus of a KODAK CHEVRON Camera, 1955
Balloon celebrating Kodak’s centennial passes above the High Falls area in the company’s headquarters city of Rochester, N.Y.
(1980년은 Kodak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
# Kodak을 비롯해 다양한 카메라와 관련 제품들 출처 George Eastman Museum 외
Alphonse Giroux, France. Full-plate daguerreotype camera 다게레오 타입 카메라, 우측은 보관함에 수납한 상태
|
Frères Lumière, Paris, France. Cinématographe (as projector) 프로젝터 |
|
|
|
Meteor stereoscope (스테레오스코프) ∞ |
Sliding box stereo wet plate camera | |
양안의 시차를 이용해 입체감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 (3D안경 비슷한...) |
스테레오 카메라 |
|
|
Eastman View No. 2D 1921 |
RB Auto Graflex 1910 |
Alfred Stieglitz가 사용했던 Kodak의 카메라 |
|
|
|
Brownie Camera |
Brownie Camera |
Vest Pocket Kodak Autographic Special |
|
Ansel Adams가 사용하다 George Eastman Museum에 기증한 브라우니와 포켓 카메라 |
|
|
Super Kodak Six-20 1938 |
Linhof Präzisions Kamerawerk GmbH Technika III |
Vanity Kodak Model B No. 2 Stereo Brownie Model A No. 3A Folding Brownie Model A
Kodak 35 PH324 ∞
Kodak의 여러 카메라들 ∞
Type 028N Kodak Retina IIIC, Kodak AG
Kodak Fun Saver 35 camera with Flash Kodak Cameo Autofocus
Kodak Dock-n-Go 2001 Kodak DC210
Kodak EasyShare DX6490 2004 Kodak Pro 14n 2004 Kodak EasyShare One 2006
George Eastman Museum 죠지 이스트먼 뮤지엄에 보관중인 컬렉션
# Brownie 시리즈 출처 brownie-camera.com
No.2 Beau Brownie 1930
Baby Brownie 1934
이 모델은 큰 변화없이 New York World's Fair Model로 1939년에 다시 선보이기도 하였다
|
|
Brownie Target Six-20 1946 필름이 장착되어 있는 Brownie Target Six-20의 단면
Baby Brownie Special 1939 Brownie 127 1952
Brownie Hawkeye 시리즈 1949
Brownie Vecta 1963
Brownie Fiesta Camara 1962 Brownie Fiesta 3 Camara 1965
# Camera: A History of Photography from Daguerreotype to Digital by Todd Gustavson
'Frame By Fr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R, 16R, 20R, 24R...??? 해상도와 사진의 크기 (업데이트 2018.11.28) (1) | 2016.09.07 |
---|---|
▶ 사진가를 위한 필독서 및 추천 영상 모음 (업데이트 2018.06.02) (2) | 2016.01.04 |
┌ 1. 사진가를 위한 - 입문서 (업데이트 2017.03.12) (0) | 2015.12.29 |
├ 2. 사진가를 위한 - 후보정 (업데이트 2018.06.02) (1) | 2015.12.02 |
├ 3. 사진가를 위한 - 인문학 (업데이트 2017.03.08) (0) | 2015.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