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카메라...
Frame of AKA 2014. 12. 1. 17:44 |태어나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을 때를 기억하는가?
유달리 어린 시절을 기억못하는 내게도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던 기억만은 분명하게 떠올리 수 있다.
아니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있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기억들이 흐려지고 있지만 그날만큼은 기억을 헤치고 올라와
셔터를 누르던 그순간의 감촉마저 점점더 생생해지는 착각을 경험한다.
유년시절,
소풍,
봄인지 가을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따가웠던 햇살...
그리고 아버지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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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 10살무렵인듯 싶다.
당시 우리집에는 카메라가 하나 있었는데
재산 목록으로는 손에 꼽을 만한 값비싼것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행여 누가 훔쳐갈까 싶어 카메라를 장롱속 이불 사이 깊숙이 넣어 두고
가족모두 명절을 쇠러 갔던 기억이 나니 말이다.
요즘같으면 친척모두가 모이는 명절이니 카메라를 챙겼을법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혹시 가지고 갔다 잃어버릴지 몰라 두고가야만 했던 카메라였다.
음.... 당신들.... 아마 라이카를 떠올렸겠지? ^^
하지만 감히 만져볼 생각도 못했던 그 카메라가 조금 철이 들고나서 페트리(Petri 7s)란 사실을 알았다.
근래 인터넷을 뒤져보니 당시에는 상당히 많이 팔린 대중적인 모델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비싸다는 말은 정정해야겠다.
형편이 넉넉치 않아 재산목록순위에 이름을 올렸을 뿐
그리 비싼 카메라는 아니었는지도 모르니까.
필름이 장전된 페트리의 셔터를 눌러본 그날은 국민학교 소풍날이었다.
지금의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은 상상도 못할 때고 민속촌이나 대공원도
큰 결심을 해야 한번 나설 수 있는 형편이라 소풍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집 뿐 아니라 대부분 넉넉치 않을때여서 운동회나 소풍같은것은
당시로서는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소중한 행사였던거 같다.
가볍게 뒷산을 오르는 수준의 소풍임에도 이모, 고모,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찬합에 김밥을 싸들고 따라나서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산을 오르는 동안 아버지의 카메라는 나를 향해 있었다.
반짝이는 렌즈알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가 보다.
한장만 찍어보겠다고 갖은 떼를 다 썼고
호기심은 드디어 셔터를 눌러볼 단 한번의 기회를 만들어줬다.
흔들리지 않게 카메라를 파지하는 방법.
호흡을 고르고 가볍게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몇번의 당부.
뷰파인더 한가운데 사람을 두고 수평을 맞춰야 한다는 우려섞인 가르침.
오랜 기억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건
아버지의 말씀을 가볍게 무시하고 45도 틀어서 큰 숨을 쉬고 묵직하게 셔터를 눌렀다는 거다.
사람을 찍었던 것은 분명한데 누구를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젠 확인할 방법도 없고...
불행히도 나의 첫 번째 "작품"은 아버지 손에 찢겨졌으니까.
이미 찍는 순간부터 카메라를 기울였다고 한소리 하셨으므로
사진을 받아들고 잘못나왔다고 혼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카메라를 만져보고 사진을 찍었다는 생경한 경험만 오롯이 남아있다.
인화된 사진을 보신 아버지는 기울어진 사진은 잘 못된거라 하셨다.
그저 아직 어려서 그렇구나라는 정도의 느낌으로...
또 조금은 타이르듯이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사진은 단호하게 찢어버리셨다.
그 단호함에 잘못 만들어진 도자기를 망치로 깨는... 그런 비장함 같은 것은 없었다.
약간 아쉽긴 했던거 같지만 내게도 별 큰상처는 못되었던거 같다.
기울어진 사진은 잘못 찍은 사진이라는데 금방 수긍해 버렸으니 속상했던 기억같은건 없다.
물론 찢을 필요까진 없었던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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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사진관에서 일하셨던 아버지는 가끔 예전 기억들을 풀어 놓으신다.
칼라 사진이 없었던 시절에 사진에 붓으로 채색을 했었다는 얘기와
심지어 펜으로 필름에 직접 수정을 해야 했었다는 얘기들...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인지 날이 갈 수록 내용은 하나씩 줄어들고
항상 같은 얘길 듣는 나는 안타까움이 나지막하고 무겁게 밀려오는 느낌을 받는다.
아버지에겐 그때 일들이 젊은날의 빛나는 추억으로 남아 되새김질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장남이라 져야했던 직업인으로서의 기억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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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작은 아이의 꿈은 약사다.
피아노를 배움과 동시에 약사는 피아니스트로 바뀌었다.
지금은 피아니스트에서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곧 무언가 다른것으로 바뀔것이며 과거의 꿈은 잊혀질 것이다.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고... 그러면서 내 손에 쥐어진 페트리는 몇번의 이사끝에 사라졌다.
아이가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할 때마다 나는 페트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의 꿈 역시 사진 작가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버지의 꿈도 작은아이의 꿈처럼 무언가 다른것으로 바뀔 기회를 얻었다면 좋았겠지만
페트리와 같이 세상을 굴러다니다 사라져 버렸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 아버지의 카메라는 캐논 550D에 번들렌즈로 바뀌었다. ^^
연세가 있으셔서 그렇겠지만 카메라를 잡은 손이 떨리는걸 볼 때마다
번들렌즈에 손떨림 방지 기능이 있다는게 참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모든것들이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의 번들렌즈도 해가 갈수록 손떨림 방지기능이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기억에만 남는 날이 오겠지.
더 늦기전에 아버지를 프레임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뷰파인더 너머로 아버지를 마주하는게 쉽지않다.
더 늦어지면 안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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